아버지

2005. 5. 5. 23:02Favorite/StarWars


아버지








"그런 잔인한 말씀 마세요. 마스터, 당신은 제게 아버지와도 같은 분이신 것 아시잖아요."

아버지. 이미 몇 번이나 들어온 그 단어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벌써 셀 수 없이 되풀이 되어온 지긋지긋한 대화. 아나킨이 과거에 자신에게 아버지를 겹쳐보던 순간이 과연 존재하긴 했었을까. 이제 와서는 단지 잔소리를 효과적으로 그만두게 하고자 하는 빈말에 지나지 않은 것 아닌가 하고 의문을 품었던 것 조차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자신 역시 아버지란 존재를 몰랐고. 이미 형식에 불과하지 않는 그 단어는 이 사제간에 있어서 어느새 허울좋은 거절의 수단일 뿐이었다.

하나뿐인 그의 파다완은 오늘도 역시나 그의 마스터인 오비완의 말이 이미 자신에게는 닿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다. 이미 당신에겐 배울 것이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그러니 이제 그만 포기하고 자신을 놔달라고. 자신은 기사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당신은 스승이 될 자질이 부족하다고... 아나킨이 명령무시와 규율위반을 통해 몸소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횟수가 빈번해 진지 오래다. 충고를 부러 듣지 않고, 지시를 보란 듯이 거역하면서 그 와중에도 타고난 재능을 십분 발휘해 기막히게 결과만은 이끌어내어 자신의 마스터를 골탕먹이는 것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는 파다완은 어느새 훌쩍 자라 누가 보기에도 매력적인 청년이었다. 암살자를 ?아 들어간 코루산트의 퇴폐적인 분위기가 넘쳐흐르는 락카페에서 여인들의 이목을 끄는 것이 느껴졌다.

인상적인 푸른 눈과 오뚝한 코, 도톰하고 사랑스러운 입술. 수려한 용모에 걸 맞는 늘씬한 팔다리를 지닌 그는 또한 10대의 티를 완전히 벗지 못한 20대 초반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풋풋함으로 인해 더욱 빛났다. 고지를 향해 왕성히 성장하고 있는 아름다움이 한층 눈길을 끈다. 그러나 그와 단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볼 지라면 오만하기 이를 데 없고 소양이 갖춰지지 않은 그의 내면이 조금도 그의 외모를 쫓아와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누구라도 곧 불쾌감을 느끼고 말 것이다. 그의 성숙하지 못한 정신은 단아한 그 용모를 도리어 비웃음거리로 만드는 듯 했다.

그러나 아나킨을 그렇게 키운 사람은 바로 다름아닌 자신이었다. 아나킨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그의 극도로 포스 센서티브한 면은 오비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게다가 그 아이는 어린시절에 노예생활을 경험한 탓에 템플에 입문했을 때에는 이미 약육강식이라는 힘의 균형을 긍정하고, 힘의 지배를 인정하고 있었다. 어린이답게 정의에 대한 열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다이 수련생으로 키워지면서 새삼 부조리한 힘의 지배를 재차 확인할 수 밖에 없었던 아나킨이었기에, 오비완은 그 아이의 정의감이 소리 없이 고사하는 것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반면 힘에 대한 그의 동경은 시간이 갈수록 숭배에 가까워져 갔다.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제다이에게는 좀처럼 걸맞지 않는 그의 가치관은 템플에서의 수련과 오비완과의 생활에도 불구하고 표백되는 일은 끝내 없었다. 마스터로써 몸소 모범을 보이고 그를 이끌어 가야 할 자신은 그 아이를 설득할 수 없었다. 외려 아나킨은 오비완을 바라보며, 오비완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 즉, 제다이를 부정하고 말았다. 종종 비효율적이 되기 쉬운 제다이의 가르침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결코 수긍하지 않았다.

그 아이를 위해 그 아이가 부디 알아 줬으면 하는 제다이의 가르침. 그것은 마스터 콰이곤 진이 12년간의 사제생활을 통해 몸소 자신에게 전수해준 제다이로서 지녀야할 것들이었다. 현실에 대한 타협과 포기. 달관된 자세. 냉정한 판단. 현상을 알리는 직감에 사로잡히는 일 없이 사고를 통하여 전체를 볼 수 있는 상태. 원하는 일을 성취하기 위한 중립. 성공하는 것보다 실패하지 않아야하는 제다이로서의 마음가짐. 반드시 이기겠다는 등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면 오히려 위험하다는 사실의 숙지. 언제나 달성할 의지를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실패했을 경우의 일도 반드시 생각해 놓는 신중함. 그리고 다소의 비효율성을 감수할 필요성. 이중 무엇 하나도 위험한 제다이의 삶에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나 그 아이의 뼈아픈 과거가 그로 하여금 효율성과 결과를 중시하게 하는 반면 과정을 경시하게 만들었으며, 그의 억눌린 감성이 힘을 행사할 것을 간절히 원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노예생활과는 다른 의미로, 그러나 더욱 더 혹독하게 금욕적일 것을 요구하는 제다이 수련생으로서의 삶이 그 아이를 차츰 병들게 했다. 한편으로 오비완도 또한, 아나킨이 어긋나면 어긋날수록, 초조해졌다. 그 아이에게 모범이 될 수 있도록 바라여 제다이로서 존재하고자 제다이의 모습에 얽매여갔다. 그것이 그 아이로 하여금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에게도 파다완에게도 지나치게 엄격해지는 경향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나킨과 오비완의 사제 관계 또한 삐꺽삐꺽 조금씩 확실한 금이 가고 있었다.

아나킨의 미성숙한 정신과 타고난 재능, 거기에 잘 닦여진 기술이 더해져서 일으키는 불협화음은 종종 오만과 조급이란 불청객의 얼굴로 고개를 불쑥 내밀곤 했다. 그래서 더 불안해 지는 것이다. 힘은 과한데 그것을 제어할 정신은 도통 따라주질 않으니. 지나치게 강한 포스 감응력에 끌려 다니기 쉬운 그의 파다완이었기 때문에. 그를 걱정하니까. 그 아이가 잘 되길 간절히 바라므로. 아나킨을 사랑하고 있기에. 이렇게 미간을 찌푸리고, 더욱 많은 잔소리가 나오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어 보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왜 내 말을 듣지 않는 거니?"
"저도 노력은 하고 있어요."

현실은 냉혹해서 마스터의 말을 노골적으로 오른 귀로 듣고 왼 귀로 흘려 보내는 파다완을 오비완은 단지 속수무책으로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아나킨의 이런 태도는 오비완에게 심한 무력감을 안겨줬다. 그러나 자신의 미숙한 내면을 성찰하는 일 없이 마스터가 파다완의 재능을 시기하여 발목을 잡는 것이라고, 오비완에게 배울 것이라곤 조금도 남지 않았다고 매도하는 아나킨의 사고방식에 자존심이 상하는 고통보다도, 그를 온전히 제다이의 길로 이끌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무력감보다도. 조금도 그 아이답지 않은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그의 행동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니, 정확히는 바로 자신, 그의 마스터인 오비완 케노비가 그의 파다완인 아나킨 스카이워커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절망보다도 슬픔이 앞서버리는 것이다.

처음 템플에 왔을 때 비록 아나킨에겐 많은 단점이 있긴 했지만, 동시에 그 단점을 보완하고 상쇄할 만큼 많은 장점 또한 갖고 있었다. 그 중 한가지는 그 아이의 다정다감하며 악을 증오하고 의리를 지킬 줄 아는 곧은 성품이었다. 오비완은 이 타는 듯이 뜨거운 사막에서 온 어린 소년과 사제관계를 맺어가면서 콰이곤 마스터와의 수행에서도 결코 느껴본 적 없는 충만감을 맛볼 수 있었다. 그것은 제다이 오더가 금하고 있는 끈끈한 가족애에 한없이 가까운 깊고 진실된 유대감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의 파다완은 사랑 받고 싶어하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먼저 사랑할 줄 아는 아이였다. 초기에야말로 아나킨이 내비치는 뜨거운 열기에 놀라기도 했지만, 이윽고 어머니를 먼 은하계의 저편 열사의 행성에 홀로 남기고, 9살이라는 이례적으로 많은 나이로 입문한 이 소년에게는 그가 그의 어머니에게 쏟아 붓던 사랑, 갈 곳을 잃은 애정을 받아줄 존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을 사랑해줄 누군가 보다 자신이 사랑할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사랑스러운 그의 파다완. 오비완은 템플 출신으로서 일말의 의문도 갖지 않았던 것들을 자신의 파다완에게서 배웠다. 비록 제다이 오더의 가르침과는 어긋나는 것이었고, 실질적으로 제다이인 자신으로서는 그의 애정에 제대로 응할 수 없었지만. 그 아이에겐 필요한 관계란 사실을 받아들였고, 간접적으로나마 가족을 얻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자신을 채우고도 넘치는 그 아이의 사랑이 이윽고 그의 어린 첫사랑 파드메에게로 향하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불가피해 보였다. 그래서 모르는 척 눈을 감기로 했다. 그토록, 인간미가 조금 지나쳐, 제다이로써 해나가기엔 힘들지 않겠는가 하는 걱정마저 불러 일으키던 그런 그 아이였건만.

널 시기해서 네 발목을 붙잡고 있다고?
도대체 나보고 더 이상 뭘 어쩌란 소리니.
앞으로 더욱 빛으로 발돋움할 너와는 달리, 나는 나로써 이미 이렇게 완성되어 있는데.

그를 시기해서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니 웃기지도 않는다. 오비완은 사실은 이 오만방자한 파다완에게 이런 관계는 이제 그만 끝내자고 종지부를 찍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파다완의 기사서임은 가장 간단하게 그들의 사제관계, 마스터와 파다완의 관계를 종식시켜줄 이상적이고도 합리적인 수단이었고, 그의 파다완의 재능이나 기술은 제다이 기사 자격에 이미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오비완은 파다완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막연한 신뢰는 가지고 있었지만 그 아이와 처음 대면했을 때 느꼈던 그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제다이로서 금기시 될만큼 그 아이와 깊은 유대를 가지면서도. 아나킨과의 유대가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그에 대한 불안감 역시 뚜렸히 그 모습을 들어냈다. 그래서 오비완은 종내 마스터가 파다완을 믿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제다이 마스터로서 과연 어떨 것인가 의문스러워했고,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시달렸다. 그러나 명령무시와 규율위반이 일상다반사인 자신의 파다완의 천방지축인 행각은 그 아이가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을 안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언제나 감시 하에 파다완을 두고, 보다 높은 효율을 포기하면서까지 단독임무를 맡기어 각기 행동하기보다는 되도록 함께 하려고 한다. 그래서 총명한 자신의 파다완, 아나킨 또한 민감히, 그의 마스터가 갖는 이런 의구심을 예민하게 느끼고 마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도무지 훔쳐낼 수 없는 불안의 기원은 사실은 그뿐만은 아니다. 만약, 혹시라도 자신이 그의 교육을 실패한다면-… 아나킨은 제다이 오더에서 추방시키기에는 이미 지나치게 위험했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포스 감응력은 지나치게 강했고, 기술은 너무나 잘 닦여있었다. 틀림없이 자신은 강한 절망감과 역시 아나킨은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는 체념, 그리고 아나킨에 대한 신뢰와 애정에 눈이 가려서 제다이 오더가 멸망할 정도로 현실인식이 너무 늦어버린 스스로에 대한 질책뿐만 아니라 뒤돌아선 아나킨을 책임지고 처분 해야만 하는, 실패라는 한마디 단어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묘하게 현실적인 끔찍한 예감에 오비완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럴 리는, 그렇게 될 리는 없다. 그의 파다완이 그를 배반하고, 제다이를 배반하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없어야 한다. 없.어.야.한.다.

그러나 자신도 믿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믿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특히나 그 아이는. 정말 영리하니까. 아아, 그래서. 알 고 있다. 그가 파다완을 믿을 수 없다는 마스터를 더욱 곤란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에 스피더를 더욱 더 난폭하게 운전하고 있다는 것을. 불필요하게 반항적이 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그 아이의 절규다. 핏기가 가신 마스터의 얼굴. 말문 막힌 오비완의 입. 이럴 때만은 그 밉살스러운 입은 다물고 있다며 기뻐하는 것이 포스를 타고 고스란히 느껴져온다. 아나킨은 거의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눈을 굳게 감고, 입을 살짝 벌린 채 몸에 과한 부담마저 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스피드에 대항하기 위해 꽉 다문 이빨 사이를 비집고 기어코 기어 나오려는 비명을 눌러 담느라 분투 중인 자신의 약간 상기된 뺨과 약간 흩어진 숨결이 그 아이를 즐겁게 하는 듯했다. 다 들린다. 나의 하나뿐인 파다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떨고 있고, 그는 살짝 울먹이고 있다. 당신에게는 그런 얼굴이 어울린다-고?

언젠가부터 시작된 시험. 무엇에 대해서도,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우선 인내하라고 제다이의 가르침을 전수한 제다이 마스터가 과연 어디까지 참나 보자고 다시 한 번 벼르는 듯한 난폭한 비매너 운전이 오늘도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도무지 자살행위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것이 그 아이가 비난하는 방법이었다. 알 고 있었는데, 자신은. 이것이야말로 그 아이의 소리 없는 절규라는 사실을. 알 고 있었건만.

그러나 오비완은 그를 달래고 사과할 적당한 말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일시 방편인 거짓으로 사랑하는 파다완을 다시 한번 거절할 수는 없다. 그런 변명으로... 그의 절규, 그의 비명. 그의 기대, 그의 사랑으로부터 도망치면서- .

“라이트세이버를 소중히 해라. 라이트세이버는 네 목숨이나 마찬가지이다”
“신속히, 동시해 안전히 운전하거라”

또다시 한바탕 잔소리만 늘어 놓았다. 그 아이가 안 듣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그 누구보다도 더욱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제 자신의 말은 조금도 그 아이에게 닿지 않는다는 사실을 도저히 모를 수는 없었지만. 애써 모르는 척 없었던 일로 만들면서까지. 앞으로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그 아이를 이끌겠노라고. 소중한 파다완을 아끼고 사랑하니까.

물론, 그런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믿고 싶지 않은 진실과 듣고 싶지 않은 절규에서는 눈과 귀를 모두 돌린 채, 자신의 이상만을 인정하여 숨막히도록 강요하는 지독한 이기주의일 뿐.

모두가 아니라고 하는 그 순간에도 그의 마스터이자 그가 아버지이기를 원했던 그 아이의 마스터 오비완 케노비 자신만은 그를 믿어줬어야 했는데.

언젠가 너로 인해 죽음이 도래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런데도 조금도 소름이 돋지 않는 것이 어쩐지 더욱 오싹하구나.
사랑한단다. 나의 파다완, 아나킨 스카이워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