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

2005. 6. 11. 13:10Favorite/StarWars

*이하의 글은 아나킨의 일인칭시점 아나오비전제의 무스타파 장면 행간 읽기를 시도한 글입니다. 원작의 이미지를 크게 훼손하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피해주세요.











파국





당신을 갖고 싶었어. 당신을 사랑했어. 하지만 곧 알았어. 당신은 그 누구 것도 되지 않아. 당신은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내가 이렇게 갈팡질팡하는데도 당신은 언제나 신중했지. 민감히 감지하고 경계하고 다독이고 주의 주면서도 당신은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아. 당신의 그 침착 냉정함이 싫었어. 당신을 곤란하게 해주고 싶어서 심술을 부렸지. 당신을 골탕먹이고, 곤혹스럽게 해. 일부러였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당신을 상처 입히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야. 나는 이미 이렇게 진창인데, 당신은 너무 고결하니까. 당신에게 나를 각인시켜주고 싶었어. 나로 인해서 눈물을 흘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핏방울 한줄기 떨굴 새라면, 어쩌면 당신은 나를 기억할지도 몰라.

당신에게 특별하고 싶었어. 사실 특별했어. 하지만 그건 내 입장 때문이었지 나 자신 때문이 아닌 것 알아. 아니까.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성이 차지 않아서 이토록 당신에게 목마른 내가 보이지 않는 당신을 부정했어. 왜, 어째서 날 못 보는 거야, 난 이렇게 당신을 필요로 하는데. 섭섭함은 점차 빈정거림으로 무장했어. 당신은 날 보지도 못하잖아? 그런 당신이 나에 대해서 알 수 있을 리 만무해. 그렇게 당신의 말을 듣지 않아도 난 뭐든지 당신보다 잘 할 수 있다고, 문제 없다고 오기를 부렸어. 당신은 완고했어. 난공불락이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금도 상처입지 않은 건 아니야. 당신이 애써 감추고 있는 슬픔이 잔잔히 느껴져서, 그 필사적인 추스림이 느껴져서 사실은 마음 아팠어. 괴로웠지, 당신을 상처 입히고 싶다고 그렇게 원했는데도, 막상 상처 입은 당신을 보는 마음은 그게 아닌 거야. 당신에게 고해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어. 당신이 날 이해해줬으면 하고 바랬고. 하지만 난 알고 있었지. 당신은 날 이해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당신은 일개인을 위해 대의를 저버릴 사람이 아니야. 아무리 나를 위해서라도 당신은 그러지 않아. 알고 있었어. 그리고 이런 것도 알았지.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게 아니었다면 당신에게 이토록 숨도 못 쉴 만큼 빠지지 않았어. 봐요, 오비완, 나는 지금 이순간 당신을 이렇게 사랑해.

그래서 당신의,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의 몰이해는 날 죽일 수 있어. 난 상처입고 싶지 않아. 그렇다고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할 수도 없어. 당신이 타인이 된다는 사실은 내 숨을 멎게 해. 그러니 당신이 날 이해하지 못할, 몰이해가 표면에 들어날 기회는 주지 않을 거야. 파드메, 나의 천사. 그녀와 관계를 맺었을 때 당신과 나 사이에 균열을 가져올 모든 사실을 감추기로 했어. 솔직히 두려웠어. 당신이 눈치채고 이제 끝이라고 말할까봐. 언제나 마음 졸였어. 하지만 당신은 이번에도 보지 못하더군. 꾹 깨물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비웃음이 나왔지. 당신은 날 못보고 있어. 아직도 못보고 있어. 앞으로도 못 볼지도 모르지. 마음 속 깊이 어떤 우월감이 마음속을 가득 채워서 희열에 몸을 떨었어. 물론 안도하기도 했지. 하지만 조금은 섭섭했어. 그리고 몹시 외로웠어. 제발 날 봐줘요, 오비완! 그렇게 외치고 싶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한 말들은 달랐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지만, 언제나 참았지. 당신을 사랑하니까, 앞으로도 사랑하고 싶으니까. 전부를 가질 수 없다면 부분이라도 가져야만해. 아무것도 갖지 못할 수는 없으니까. 진실 속 깊이 거짓을 잉태했어. 모든 진중함엔 허구가 따라왔지. 어쩔 수는 없는 일이라고 타협했어. 어차피 그런 것은 나의 진실을 조금도 상처 입힐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어. 아니, 믿고 싶었지.

그래서 몰랐어. 약한 독에 서서히 중독되듯이 어느새 점차 망가져 이미 궤도를 벗어나 버렸다는 사실을. 둘 다 가질 수는 없어.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착각이었어. 나는 필히 한가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었던 거야. 그걸 몰랐어.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은 단지 잊고 싶었지. 언제나 그랬어. 그래서 그녀에게서 당신의 이름을 듣는 것이 싫었어. 그녀는 온전히 내 것이야. 당신도 내 것이야. 당신과 그녀 사이에 신뢰가 있는 것이 싫어. 그 사이에 나는 끼어들지 못할 것 같아서. 내가 모르는 그녀와 내가 모르는 당신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언제나 그저 그녀도 당신도 온전히 내 것으로만 하고 싶지. 그녀가 당신을 언급할 때면, 당신이 그녀에 대해 얘기할 때면, 나는 그녀가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님을, 당신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님을 직시해야만 하거든. 그래서 싫었어.

그녀가 내게 말했지.
"그는 알고 있어. 그가 우릴 보살피고 있어."
의외였어. 당신은 원칙을 어겨가며 제자를 감싸줄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지 조금도 당신답지 않은 행동이야. 정말 의외였어. 실소가 나오더군. 그럼 지금까지 웃기는 연극을 둘이서 해온 샘이야. 나는 북 치고 장구 쳤고, 당신은 내가 연주한 웃기지도 않은 장단에 맞춰 짐짓 진지한 척 노래해 준 것뿐이었어. 물론 마음 속 한 귀퉁이에는 당신이 사실 날 제대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소소한 기쁨도 있었지.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야. 이미 늦었는데, 이젠 돌이킬 수 없는데. 오래토록 바래왔던 진실이 오히려 더 큰 비웃음거리가 되었어. 지금은 단지 그녀의 입에서 당신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참을 수 없이 불쾌해.

"그만, 그만 둬, 돌아와, 널 사랑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날 사랑한다고 돌아오라고 권유하는 그녀의 뒤에 당신이 서있어. 하필이면 당신이! 화가 나. 이루 형용할 수 없는 화가 치밀어. 그녀를 살리기 위해 나는 당신을 버릴 것까지 각오했는데, 그런데 그런 그녀는 기어코 당신을 달고 온 거야. 이 나를 죽이기 위해! 파드메, 나의 천사. 그녀가 죽도록 미워. 내게 이 모든 것을 감수하게 한 그녀를 용서할 수 없어. 봐, 화가 소중한 것을 갈갈이 찢는 모습을. 난생 처음 포스로 목을 졸랐어.
"그녀를 놔줘! 아나킨! 그녀를 놔줘!"
이번엔 당신이 그녀의 얘기를 해. 불쾌해. 당신을 저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눈물이 흘렀던 것이 아득한 옛날 같아. 그런 일 처음부터 없었던 것 아닐까? 난 내 기대를 그 오랜 기간 저버린 당신을, 깜찍한 그 얼굴로 날 속여온 당신을 난 이렇게 미워하는데! 당신은 끝내 날 배반했어! 당신을 증오해! 당신은 그냥 죽이지 않아. 그런 걸로는 부족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