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Books2021. 7. 14. 16:44

아침햇살의 천부경 강의 3장

 

근원에 머물며

만왕만래 하는 사람

 

존재에 발을 딛고

심心과 성性을 닦으며

세계와 관계하는 4번가 사람

나는 삶의 예술가

 

대삼합육생칠팔구 大三合六生七八九

 

대삼합(천일天一과 지이地二와 인삼人三의 총합)은 육이 되어

칠과 팔과 구를 낳고

 

大 큰 대

合 합할 합

六 여섯 육

生 날 생

七 일곱 칠

八 여덟 팔

九 아홉 구

 

운삼사성환오칠 運三四成環五七

 

삼(내단전內丹田: 머리 가슴 배)과 사(외단전外丹田:팔다리)로 운행하고 오(오륜五倫)와 칠(칠정七情)로 순환하며 이루니

 

運 돌릴(운행할)운

四 넷 사

成 이룰 성

環 돌 환

五 다섯 오

 

상단전 머리 생각 지(지력) 천天
중단전 가슴 느낌 덕(심력) 인人
하단전 체(체력) 지地

 

그러므로 삼과 사를 운행한다는 것은 머리와 가슴과 배가 통합되고 손발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삼이 원만해지고 사가 열리는 거죠.

삼이 사람의 내면적, 개인적 수도방법이라면 사는 공동체적, 사회적, 외향적 활동을 의미해요.

이 둘이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내면에 가득한 지혜의 빛과 사랑, 생명 에너지가 외면적 활동과 결합하여 삶으로 표현된다.

 

삼사는 심의 세계, 즉 여기 나 없이 있음에 속하고 오칠은 성의 세계, 즉 이곳 나되어감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4번가 사람인 삶의 예술가로 살려면 둘 다 수련하여 운삼사성환오칠을 이루어야 한다는 거예요.

하나만 건강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일묘연만왕만래一妙衍萬往萬來

용번부동본用變不動本

 

하나는 신묘하게 흐르면서 만번을 가고 오며 쓰임이 변화하나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妙 묘할 묘

衍 흐를 연

萬 일만 만

往 갈 왕

來 올 래

用 쓰일 용

變 변할 변

不 아니 부

動 움직일 동

 

하나의 근본은 변함이 없되 디자이어로 나타날 때는 신묘하게 변화한다.

유일신이라는 건 나뉘지도 않고 나눌수도 없는 하나, 스스로 없이있는 존재 그 자체이지요.

그러니 유일신을 섬기는 이는 어떻겠어요?

해와 달과 나무와 풀과 내가 하나임을 알아요.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요?

그 하나에 뿌리를 박고, 다시 말해 존재라는 반석 위에 집을 짓고 만왕만래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거죠.

그냥 존재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근원에만 붙어 있는 게 아니라 운삼사 성환오칠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오만 가지로 나타나 끊임없이 되어가며 관계를 맺는 게 바로 우리가 할 일입니다.

여기나없이있음과 이곳나되어감이 통합된 삶을 사는 사람은 이처럼 시공간을 뛰어넘어 모든 것을 새롭게 느끼고 받아들이며 살 수 있습니다.

 

 

 

눈뜨면 이리도 좋은 세상 159~179p

 

 

생각

 

내가 육체를 입고 세상에 왔다는 것은

생각을 하고 생각을 만나 생각을 살러 왔다는 말이다.

 

생각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삶의 질이요 양이다.

생각 없이 나를 찾을 수 없고, 생각 없이 나를 살 수 없다.

삶을 산다는 것은 생각을 산다는 것이다.

 

삶의 멋과 맛은 다 생각에서 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보지 못하고

통로인 생각에 붙잡히고 수단인 생각에 끌려 다닌다.

생각을 요리하지 못하고 생각에 먹히고

생각을 다루지 못하여 생각의 노예로 평생을 산다.

 

깨어난다는 말은

생각의 껍질을 하나하나 벗고 나온다는 말이다.

 

겹겹이 되어 있는 생각의 껍질을 하나하나 벗고 나와

순수 그리스도의식인 영성이 발현하도록 하자는 것이요

모든 성현들의 가르침이다.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생각이다.

또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함께 하는 것이 생각이다.

이 세상에 와서 돌아갈 때까지 함께 하는 것이 생각이다.

그러니 생각과 친하게 지내야 하지 않을까.

친하게 지내려면 생각을 존중해주고 생각의 성질을 알아

그에 알맞게 대하여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내가 먼저 생각과 좋은 친구가 되면

생각은 절대 배반하는 법이 없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몇십 배, 몇백 배로

갚아주고 도와주는 것이 생각의 성질이다.

반대로 생각과 잘 사귀지 않고, 돌보아주지도 않고

안부도 묻지 않고, 마구 대하면 생각도 나를 그렇게 대한다.

나를 망하게 하는데 엄청난 친구들까지 동원해서 가세를 한다.

 

생각과 잘 사귀어 보라.

생각과 좋은 친구가 되어 보라.

생각은 천사가 되어 나를 하늘문까지 데리고 가준다.

자기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사라진다.

그 생각이 끝나는 자리가 하늘이다.

생각은 우리를 하늘까지 데리고 가려고 오늘도 애쓰고 있다.

 

 

관광

 

여행은 익숙한 것들을 떠나

낯선 곳에서 새로운 눈과 아름다운 귀를 갖고

돌아오는 것이다.

돌아와 새로워진 눈과 아름다운 귀로

내 집과 내 나라가 제일 좋고

내가 하는 일이 가장 알맞고

나와 함께 사는 가족과 친지와 동료가 참 귀한 것을 아는 것이다.

 

떠난다는 것은 불편을 스스로 겪겠다는 것이다.

불편과 모험을 감당할 용기 없이는 떠날 수 없고

떠나지 않고서는 여행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떠난다는 것은 그 무엇인가를 버려야하고

그 누구인가를 잃어야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여행은 모험이다.

낯설고 모르는 것 투성이다.

길을 물어야 하고 음식맛을 물어야 하고 화장실을 물어야 한다.

그러니 여행은 불편하다.

여행은 이렇게 자신을 불편과 모험 속으로

스스로 집어넣는 자기 단련이다.

 

여행은 빛을 보는 관광이 되어야 한다.

이미 그곳에 드러난 빛의 보고

그 빛을 통해 내 안에 있는 빛을 보아야 한다.

어디나 거룩한 땅이요

누구나 거룩한 사람이요

언제나 거룩한 시간이다.

 

삶은 여행이요 관광이다.

삶은 여행을 통해 빛을 보는 것이다.

인생은 여기 나 없이 있음을 떠나

이곳 나 되어감의 세계로 나오고

이곳 나 되어감의 세계에서

다시 나 없이 있음으로 돌아가는 여행이다.

여행자는 어느 한곳에 멈추지 않고

그 무엇에 붙들리지 앟ㄴ는다.

돌아갈 때와 기한이 있음을 알고 있어

어느 한곳 더 보려고 하고

무슨 얘기 하나 더 들으려고 하고

그 무엇 하나 더 경험해 보려고 애를 쓴다.

이렇게 보고 듣고 경험함으로 안다.

 

내가 바로 빛이요.

길이요

생명임을 말이다.

인생은 이렇게 '삶'이라는 여행을 통해

'나'라는 빛을 보는 것이다.

지구별 여행, 지구 나들이

우리 모두는 지금 지구별 여행을 통해

'이런 내가 참 좋구나'를 알 수 있는 기회를 맞고 있다.

이렇게 나를 알아 가는 것이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주신 영생을 이미 살고 있다.

우리는 지금 지구 나들이, 지구별 여행중이다.

 

 

 

삶은 춤이다.

우리는 춤을 잃어버렸다.

죽은 삶이다.

 

몸을 자유롭게 하는 진리가 진리다.

몸이 굳은 것은 생각이 굳은 것이요

얼굴이 뻣뻣해진 것은 감정이 메마른 것이다.

수치심과두려움

어색함에 마음이 묶이고

그 마음은 몸을 묵고 얼굴을 굳게 한다.

춤은 선물이다.

춤은 이렇게 굳은 몸을 풀게 하고 뻣뻣해진 얼굴을 펴게 한다.

몸이 풀리고 얼굴이 풀리면 감정도 풀리고 생각도 풀린다.

춤은 이렇게 꽁꽁 묶인 몸과 마음을 풀게 하여

몸과 마음을 하나되게 하는 힘이 있다.

춤은 신비다.

춤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

춤을 추면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바깥 장단에 맞추어 만들어진 춤은 춤이 아니다.

춤은 내 안에 있는 장단과 가락을 찾아

몸을 통해 흐르는 것이다.

내 안에 나이고 싶은 생각과 느낌을 

몸으로 말하는 언어다.

춤 속에는 춤추는 이의 슬픔이 있고 외로움이 있다.

다짐이 있고, 희망이 있고, 고백이 있고, 외침이 있다.

춤을 통해 나의 과거를 만난고

현재를 확인하며

미래를 전망한다.

춤 속에서 치유가 일어나고 회복이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걸음과 제스처는 지구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춤이었다.

오늘에 와서 그 하나님은 이제는 나를 통해 춤을 추고 싶어하신다.

 

춤으로 드리는 기도

춤으로 드리는 예배

춤으로 사는 일상

 

태초에 춤이 있었다.

춤이 나와 함께 있었다.

나는 곧 춤이다.

 

 

 

사람은 그 무엇엔가 취해야 산다.

사람은 누구나 바깥이 아닌 안에 이미 술을 갖고 산다.

바깥에서 쉽게 마시고 취하는 그 취함은 싸구려다.

그런 취함은 신성을 도저히 느끼지 못하게 해주는 저질이다.

우리 안에는 이미 진짜 술이 있다.

그 술 마시는 법이 명상기술이다.

 

깨어나 살아가야한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자기만의 독특한 desire를 통해

떠올리는 취함.

자기 맛에 취해 살 때 물이었던 사람은

불이 되어 활활 타올라 자기를 다 사르게 된다.

자기 일에 취해 다 불살라 보라.

이때 알게 될 것이다.

삶 자체가 술이 아니고

내가 바로 삶에 취하고 사람을 취하게 하는

진짜 술임을 말이다.

 

 

멀미

 

변화에 따라 변화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것이 머리가 어지러움으로 반응을 한다.

그만 내리거나 아니면 변화에 잘 대처하라는 신호인 것이다.

 

운전사는 좌위회전을 할 때에 핸들을 조정하면서

차보다 조금 앞서 몸을 움직여 준다.

몸의 쏠림을 미리 방지한 것이다.

능변이다.

 

자고 있는 사람은 자동차나 비행기와

일체가 됨으로 봉변을 당할 일이 없다.

능변여상이다.

그래서 멀미를 하지 않는다.

 

능변과 어울림으로 하나 될 때에 멀미는 없다.

죽음은 인류가 겪고 있는 봉변이다.

죽음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꼼짝 못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죽음이 오기 전에 죽음으로써

사망권세의 봉변을 넘어

부활의 능변을 열어주신 분이다.

능변여상

변함으로써 변하지 않을 수 있다.

 

살았다는 것은 스스로 변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변하지 못할 때는

어지럼증의 멀미를 주신다.

이렇게 멀미를 하면서도

자기생각, 자기자리, 자기시간을 고집하면

구토를 하게 되고

결국은 쓰러지게 하면서까지도 변화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섭리다.

더 이상 스스로 변하지 못할 때는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통해서라도

결국은 변화시키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변화의 근원이시다.

멀미는 주변 적응능력을 알게해주는 바로미터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경보 시스템이다.

 

 

 

몸은 밥을 먹고 살고

생각은 생각을 먹고 산다.

어떤 음식을 먹느냐가 그 육체가 되듯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느냐가 그 사람의 삶이 된다.

음식에는 질이 있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저급의 생각은 저급의 생각을 먹고

고급의 생각은 고급의 생각을 먹는다.

더 나은 생각, 더 새로운 생각, 더 영양가 있는 생각을

골라 먹을 줄 알아야 한다.

영혼을 살찌우는 그런 생각들이 들어있는 밥상이

바로 책이다.

책을 읽고 여러 생각들을 만나는 것은

나를 찾고 나를 만나기 위함이다.

 

이 세상 모든 책은 모두 내가 어떠함을 알려주는 책이다.

내가 누구고 무엇을 해야하며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알려주는 신호들이다.

과학서적을 읽어야 한다.

이는 내 안에 오성이 있기 때문이다.

철학서적을 읽어야 한다.

이는 내 안에 이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술서적을 읽어야 한다.

이는 내 안에 감성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서적을 읽어야 한다.

이는 내 안에 영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성과 이성과 감성과 영성으로 되어 있어

과학과 철학과 예술과 종교를 만나야 한다.

그래야 내가 되고 내가 사람인 것을 알게 된다.

 

책을 읽지만 책에 갇히지 말자.

그러려면 내가 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보게 해야 한다.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읽게 해야 한다.

나는 그 책이 있기 전부터 있고

그 책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모든 책은 나의 사건기록이다.

나의 사건들을 읽어 보여주려고

수많은 책들이 지금 기다리고 있다.

 

 

 

 

 

Posted by logos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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